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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span lang="ja" style="font-family: Hiragino Sans, Hiragino Kaku Gothic Pro, Meiryo, Yu Gothic, MS Gothic, Noto Sans JP">下関条約</span>
/
<span lang="zh-CN" style="font-family: PingFang SC, Microsoft YaHei, Heiti SC, SimSun, Noto Sans SC">马关条约</span>
(1)
파일:시모노세키조약삽화.webp

목차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

파일:시모노세키조약원문.webp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무릇 조선의 독립 자주 체제를 훼손하는 일체의 것, 예를 들면 조선이 청에 납부하는 공헌, 전례 등은 이 이후에 모두 폐지하는 것으로 한다.

제2-3조 청이 관리하고 있는 지방(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제도 등)의 주권 및 해당 지방에 있는 모든 성루, 무기 공장 및 관청이 소유한 일체의 물건을 영원히 일본 제국에 양도한다.

제4조 청은 군비 배상금으로 순은(純銀) 2억 냥(2)을 일본 제국에 지불할 것을 약속한다. 비준 교환 후 6개월 이내에 5천만 냥, 12개월 이내에 또 5천만 냥 잔액은 6년 동안 부세하며, 미지불분에 대한 이율은 연 5%로 한다.

제5조 본 조약의 비준서 교환 후 2년 내에 청에서 일본 제국으로 할양된 지역의 인민 중에서, 할양지 이외의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자가 그 재산을 매각하여 그 할양지 밖으로 이주하는 것을 일본은 허락한다. 그러나 기한을 넘어서도 이주하지 않는 경우에는 일본 신민으로 간주한다.

제6조 청 · 일 양국 간의 기존의 조약들은 이번 전쟁에 의해 자동적으로 폐기된다. 양국의 새로운 통상 조약은 청과 서양 제국 간의 조약을 견본으로 한다.


청일전쟁의 강화를 위하여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1895년 4월 17일 체결된 조약.

2. 상세

일본측에서는 일청강화조약(日淸講和條約)이라고도 한다.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이 직접 참가했다.(3) 시모노세키를 한국 한자음대로 읽은 하관조약(下關條約)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시모노세키의 옛 이름에서 따와 마관조약(馬關條約)이라고 부른다.

1894년 8월 1일 청일전쟁 개전부터 청은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9월 15일 평양과 17일 황해에서 결정적으로 무너진다. 10월부터 영국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 제국과 공동 강화를 제의하지만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은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이번엔 단독으로 열강들에게 개입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11월 일본이 여순까지 점령하자 영국이 일본에게 단독으로 제의하지만 역시 거절당한다.

다급해진 이홍장은 러시아 제국에 중재를 요청하지만 러시아는 1886년 거문도 점령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라디겐스키와 맺은 구두 협정을 명분으로("조선 불간섭") 전쟁에 연루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10월 25일 일본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공친왕이 미국에 화친 알선을 요청하고 미국이 응했으나 일본이 거절한다. 중재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듬해 3월 14일 이홍장이 직접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굴욕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중화 질서의 변방이던 일본에게 중국이 고개를 조아린 치욕적인 사건이다.

두 차례 사절이 정전에 실패한 이후 세 번째 사절로 청의 전권대신 이홍장이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사절로 온 이홍장은 일본에 정전 요구안을 제출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동맹을 논의했으나,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1895년 3월 24일 이홍장이 회견장에서 숙소로 돌아가던 도중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청년이 쏜 총알이 이홍장의 왼쪽 뺨에 맞으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일본은 정전을 부탁하려고 온 이홍장에게 오히려 사과를 표해야 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1895년 4월 17일 결국 강화조약을 체결한다.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은 은화 3억 냥의 배상금을 2억 냥(4)으로 감액하고, 당초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양으로 대신하는 합의를 해주어서 이만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홍장 암살 미수범 고야마는 일단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천수를 누린다. 일본 정부 입장에선 쓸데없는 짓을 해 삥뜯을 꺼리를 2/3토막낸 이 눈치없는 자가 그닥 달갑지 않았지만, 일본내 여론은 청국의 사신에게 한방 먹인 사실을 통쾌히 여기고 있어 강하게 처벌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야마는 너무 천수를 누린 나머지 일제가 패망하는 굴욕의 순간까지 목격해야 했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제국은 조선의 속방 지위를 탈각시켜, 청나라의 영향력으로부터 조선을 완전히 분리시켰고 중립국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친일 내각 수립을 기도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섬할양과 같은 다양한 이권을 챙기게 되었다. 1871년에 이루지 못했던 최혜국 대우 조항도 받아냈다.

파일:청일전쟁 배상금 사용처.webp
청일전쟁의 배상금 사용처.


일본은 이같은 엄청난 이득을 비밀에 부치고 싶었으나 이홍장이 제3국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해 조약의 불평등함이 알려졌고,(5) 일본의 세력 확대에 불안감을 갖게 된 러시아 제국프랑스, 독일 제국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도로 토해내야 했다. 랴오둥 반도의 뤼순은 10년 후 러일전쟁으로 도로 뺏어온다.

3. 여담

  • 청일 양국의 협상 대표였던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는 영어에 능통해서, 동양 국가끼리의 강화 회담임에도 서로 영어로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 동아시아의 질서를 뒤흔든 규모의 조약이었지만, 의외로 정부 청사같은 건물이 아니라 슌판로라는 평범한 요릿집에서 진행됐다. 이토 히로부미가 좋아하던 복어 전문점(6)으로, 조약 당시 건물은 태평양 전쟁 때의 폭격으로 전소되어 이후 재건축되었다. 현재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1895년 4월 17일이 조선(7)독립기념일이라고 주장하곤 하는데, 이는 조선은 줄곧 청나라속국이었는데 일본이 청을 제압하면서 조선을 독립시켜주었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역사에서 보듯이 일본이 대신 차지하기 위함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감사해야 할 날로 기념하지는 않는다. 그저 러시아의 간섭으로 인해 보호국화가 10년 늦춰졌을 뿐이다. 비슷하게 일본 극우 인사들은 이 날을 타이완 섬을 청으로부터 해방시킨 날이라고 기린다.
  • 시모노세키 조약을 배경으로 한 파이 나누기 만평이 매우 유명하다. 이 만평은 2021 시즌 모기업의 자산이 부족해지고 FA로 많은 선수들이 풀린 두산 베어스를 조롱하는데 사용되기도 했다.
  •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은 다시 이겼으나 10년 전과는 달리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 조약으로 2억 냥이나 되는 배상금을 받은 것과는 참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50년 후인 1945년 9월 9일 중화민국은 일본으로부터 공식적으로 항복을 받아내며 복수에 성공했다.
(1) 둘 다 신자체, 간자체 표기로 당시에 일본 측은 下關條約, 청나라 측은 馬關條約이라 표기했다.
(2) 냥 또는 량(兩)은 무게 단위로, 1량은 대략 37.5g이다. 즉, 은괴 7500t 정도의 분량이다.
(3) 당시 일본은 이 조약을 백지화되지 않기 위해 전권을 가지고 조약을 비준할 수 있는 사람이 올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이홍장 아니면 공친왕이 올 것을 요구했다.
(4) 허나 이마저도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1억 냥은 청나라 세수의 1년, 일본 세수의 2.5년분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즉, 일본으로선 대청제국을 2년, 자국을 5년간 굴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을 삥뜯은 셈이다.
(5) 위에서 말한 고야마의 총질도 국제 여론 악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복어 전문점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비전투손실을 방지하고자 내린 복어금식령으로 인해 공식적으로는 복어를 먹을 수 없었고 법이 잘 닿지 않는 지방 서민들만 먹어왔으나, 1887년 이토 히로부미가 춘범루의 복어요리를 맛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당시 현 지사였던 하라 야스타로에게 요청해 복어금식령을 해제했다.
(7) 당시는 대한제국이 성립하기 이전이다.